41 마가복음 3장 1-12절 (7월) - "이녁은 사는 동안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죽음을 무릅쓰고 하고도, 이녁을 아니 들어나려고 합니까?"
때: 2021년 3월 5일(금). 사순절 둘째 주 성북로교회 금요기도회
곳: 성북로교회
1. 마가복음 3장 1-12절 (7월) 얼게 - "예수께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안식일에도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하시고도, 예숚께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말씀따라 아직 아니 죽었으니,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아니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7월 NA3:1-12 The man with the withered hand
1금 3:1-6 (1. 2. 3. 4. 5. 6.)
2금 3:7-12 (78. 9:10. 11. 12.)
- 물음? -
- 안식일입니다. 회당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그들(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해 무엇을 벼르고 있습니까?
- 그런데 예수께서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이는 그들(바리새인들)에게 이 안식일에 대해 무엇을 보이고 싶어하십니까?
- 그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께서 손마른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회당에 모인 그들에게 무엇을 묻습니까?
- 예수의 물음 앞에 입다물고 있는 그들 앞에서 예수께서 손마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십니까?
-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죽일 빌미가 됩니까?
- 예수께서 안식일, 회당에서 이녁을 일러바치려고 벼르는 그들 앞에서 손마른 사람의 손이 되돌려지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일어받치는 빌미, 이녁을 죽이는 빌미를 어찌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합니까?
- 예수께서 바다쪽으로 제자들과 함께 나오시니 어찌하여 많은 무리가 따릅니까?
- 더러운검들(귀신들)은 예수를 보고 무어라고 외칩니까?
- 예수께서 더러운검들(귀신들)에게 어찌하여 이녁을 아니 드러내도록 하십니까?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아들로 아니 들어나려고 합니까?"
1) 1금 3:1-6 (1. 2. 3. 4. 5. 6.) "예수께서 사는 동안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안식일에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을 하십니다."
2) 2금 3:7-12 (78. 9:10. 11. 12.) "예수께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 * 고요의 한마디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일들을 하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어야 하느님의 아들임을 들어나야 하기에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임을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과 한쪽(한편)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아직 아니 죽었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실이 아직 아니 끝났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알려져야하는 것의 사이에서 느기결(음양론, 변증법)의 그네(시소,seesaw)를 타십니다.
첫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들을 하십니다.
- 예수께서 하시는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에는 시도때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일인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을 하시는데 죽음을 무릅쓰십니다. 죽을줄 뻔이 아시면서도 하느님의 일, 해야할 일을 시도때로 없이 하십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이 어느날 하라고 날을 받아두었습니까?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하는 날이 어느 날이라고 딱 매겨져 있습니까?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안식일이라도 아니 하면 언제 하겠습니까?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에는 시도때도 없는데, 착한일이 안식일에 생겼으니, 안식일에도(안식일이니) 착한일 하고, 목숨건지는일이 안식일에 생겼으니 안식일에도(안식일이니) 목숨건지는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이 생기는 쪽쪽 그때마다 합니다.
아마(설마) 안식일이라고 일을 아니 해야 한다고 하여, 착한일도, 아니하고, 목숨을건지는일도 아니 한다는 것이 옳습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이라도 착한 일이면, 목숨을 건지는 일이라면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에는 아니 일해야 하지만, 눈 앞에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을 그냥 모른 척한다는 말입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인데 눈 앞에 벌어진 일에 대해 착한일을 하고, 목숨건지는일을 하는 것이 아니 옳습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에는 하느님께서 쉬시는 날이니, 덩달다 쉬라고 하셨기에 쉬어야 하는데, 뜸금없이 착한 일, 목숨건지는 일이 생겨으니, 오히려 할 일이 생겨겼으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닙니까? 아마(설마) 하느님께서 쉬시는 안식일이니 오히려 착한 일, 목숨을 건지는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하지 아니 합니까?
- 그래서 착한일, 목숨살리는일이라도 안식일에 하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이라고 하면 죽는다는 규정에 걸리지만,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곧 죽음을 무릅쓰고 착한일, 목숨살리는일이니 안식일에도 하십니다.
- 이처럼 예수께서 목숨을 걸고 안식일에 착한일, 목숨건지는 일을 하십니다. 헌데 이처럼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니, 바리새인들은 이때다 싶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드는 짓은 안식일 규정에 담겨진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안식일 규정의 글자에 하느님을 가두어 버리고, 이녁을 가두어 버리는 등 규정의 글자에 모두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꼴입니다. 이리 보면 이 짓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눈에 뭔가 씌워져서 못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때는 아니 기다린다(때는 기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닥친 일을 그냥 하면 됩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올바른일은 생기는 날을 아니 받아놓았기에,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생기는 쪽쪽 그냥 하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합니다. 그렇습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하려고 늘 기다리는, 벼르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합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이 생기는 그때그때마다 닥치는 대로 그냥 하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 해야 할 일을 하는 데에는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합니다. 하느님의 일, 해야할 일을 시도때로 없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께서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됨됨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일,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해야 할 일은 시도때로 없이 생기기, 생기는 쪽쪽 해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일,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목숨걸어야 할 때 일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아직 아니 죽었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실이 아직 아니 끝났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 드러나길 바라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것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사 하느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것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사 하느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것이란 하느님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죽으라는 말씀을 따라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하느님의 아들이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어진 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너는 죽으라"는 말씀을 따라 죽어져야 예수가 하느님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래하는 것(순종,복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시키신 말씀따라,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시킨신 말씀따라 죽어야 그때에서야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수께서 하느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죽기까지 아래했다(순종,복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시도때도 없이 하느님의 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일을 할 뿐아니라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고, 죽을 힘을 다해, 일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너는 죽으라"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어질 때에야 드디어 하느님의 아들로서 일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러기까지 예수께서 이녁을 하는님의 아들로서 일컬어지기를 아니 바라십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예수께서 힘껏, 죽을 힘을 다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예수깨서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으십니다. 그때에 드디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께 아래하는(순종,복종) 꼴입니다. 이녁이 예수의 이런 꼴, 모습, 매무새, 됨됨이를 닮고자 하자면, 이녁에게 하느님께 아래하여(순종,복종)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와 구실에 걸맞게 힘껏, 죽을 힘을 다해 시도때도없이 해내는 것입니다. 이녁은 사람사이에서, 수직적 가부장제 틀에서 차지하는 자리,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으로서 자리(수직적)에서, 그리고 맞멎는 자리(수평적)에서 할,바 곧 마주하는 이에게 이녁을 아니 드러내고, 낮추며, 아래하는 것(순종,복종)을, 죽기까지 이녁을 바치는 것(희생,사랑)을 시도때도없이 해 내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드러나려고 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 첫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놀랄일(기적), 놀랠일(이적), 앓음고치기, 더러운검(귀신) 쫓아내기 등을 해내지만, 예수 이녁이 무리로부터 떠받쳐지는 것, 예수 이녁이 숭배되어지는 것, 예수 이녁이 하느님을 가리는 우상숭배 대상이 아니 되려는 것입니다.
- 둘째,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죽으려고 태어났음으로, 예수 이녁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녁이 죽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이녁이 하느님께서 죽으라는 말씀따라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른(아래하는,순종하는,복종하는,고분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나야 하기에, 그렇다면 아직 죽지 아니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로 아니 여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됨됨이에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갖습니다.
첫째, 이녁에게 시도때도 닥치는 하느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죽을지도 모를 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녁은 사는 동안, 죽기까기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이녁은 사는 동안 이녁을 죽여가면서(죽음을 무릅쓰고 이녁을 드러내서, 이녁의 온 몸과 온 마음을 써먹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둘째, 이녁이 수직적 가부장제에서 차지하는 자리와 구실에 따라 해야할 하느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는 동안에는, 죽기까지는 이녁을 드러내려고 생색을 내거나, 이녁을 알아달라고 옆구리 찔러 절받으려고 하거나, 이녁을 잊지 말라고 되새기려고 아니 달라드려야 합니다. 이는 이녁이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잊혀지는 이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 어버이라면 아이에게 어버이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아이에게 쉽사리 잊혀지는 어버이가 되는(어버이를 아니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 스승이라면 배우미에게 스승으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배우미에게 쉽사리 잊혀지는 스승이 되는(스승을 아니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 임자이라면 종에게, 임자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이녁은 쉽사리 잊혀지는 임자가 되는(임자를 아니 되새기게 하는, ) 것입니다.
- 임금이라면 아랫사람에게 임금으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이녁은 쉽사리 잊혀지는 임금이 되는(임금을 아니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녁은 누구에게 이녁이 쉽사리 잊혀지도록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이녁은 사는 동안 이녁을 죽여가면서(이녁을 아니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 이녁은 사는 동안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죽음을 무릅쓰고하면서도, 이녁을 아니 들어나는 것의 쏭(妙,비밀), 깊이, 너비, 높이, 무게를 알아 살 수 있습니까?
2. 마가복음 3장 1-12절 (7월) 새김 그리고 개역개정판(1998) - "이녁은 사는 동안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죽음을 무릅쓰고 하고도, 이녁을 아니 들어나려고 합니까?"
1) 1금 3:1-6 (1. 2. 3. 4. 5. 6.) "예수께서 사는 동안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안식일에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을 하십니다."
-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오십니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지켜봅니다. 아마(설마) 안식일에 그예수께서 그를 고치면 일어바치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손마른이에게 한가운데로 일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착한 것을 하는 것, 나쁘게하는 것, 목숨을 건지는 것, 죽이는 것이 마땅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입다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꼴이 나서 그들의 염통이 굳음을 슬퍼하시고,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너의 손을 내미십시오라고 말합시다. 그 사람이 그이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되돌려집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곧 나와서 헤롯당들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서로맞춥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의 규정을 거슬린 것은 예수 이녁을 일러바치는 빌미, 예수 이녁을 죽이는 빌미가 됩니다. 이럼에도 예수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안식일에도 하느님의 일인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됨됨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일,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해야 할 일은 시도때로 없이 생기기, 생기는 쪽쪽 해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일,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목숨걸어야 할 때 일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것입니다.
1-6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마 12:9-14; 눅 6:6-11)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 예수(그)께서 다시(다시,팔린)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손,ㅎ케이르) 마른(수동.말리다크세리이노)(가지다,에ㅎ코)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복수.그들)이 예수(그)를 고발하려(일러바치다,카테고레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시중들다,고치다,ㅅ데라퓨오) 주시하고(지켜보다,파라테레오) 있거늘
3 예수(그)께서 손(손,ㅎ케이르) 마른(마른,크세로스)(가지다,에ㅎ코) 사람(사람,안ㅅ드로포)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한 가운데,메소스)에(을쪽하여,에이스) 일어서라(명령.일어나다,에게이로)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착한,아가ㅅ도스)을 행하는(만들다,포이에오) 것과 악을 행하는(나쁘게하다,카코포이에오) 것, 생명(목숨,프쉬ㅎ케)을 구하는(건지다,소조) 것과 죽이는(죽이다.아포크테이노)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땅하다,엨스에르틴)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입다물다,조용하다,시오파오)
5 그들의 마음(염통,카르디아)이 완악함(굳음,딱딱함,프로쉬스)을 탄식하사(슬퍼하다,쉴뤼페오마이) 노하심(꼴,오르게)으로(함께,메타) 그들을 둘러 보시고(둘러보다,페리블레포마이)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명령.뻗다,내밀다,엨테이노)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수동.도로되다,되돌리다.아포카ㅅ디스데미)
6 바리새인들(복수.)이 나가서(나가다,엨스에르ㅎ코마이) 곧(곧,유ㅅ뒤스) 헤롯당(복수.)과 함께(함께,메타) 어떻게 하여 예수를(거슬러,카타) 죽일까(죽이다,앞올뤼미)(한 것,호포스) 의논(함께따져보기함께맞춰보기,쉼블리온)하니라(주다,디도미)
1기림노래 : 안식일에도 착한 일하고, 안식일이니 목숨을 건지고는 것이 옳습니다. - 49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 2금 3:7-12 (78. 9:10. 11. 12.) "예수께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 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 쪽으로 나오십니다. 갈릴리와 유대로로부터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일들을 듣고 나아옵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골치거리들을 가진 이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몰려오니 예수께서 무리를 거쳐서 아니 밀도록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가까이두라고 시키십니다. 그리고 더러운 검들은 예수를 보면 그에게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녁을 아니 드러내라고 그들에게 크게 타이르십니다.
-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아직 아니 죽었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실이 아직 아니 끝났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드러나려고 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 첫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놀랄일(기적), 놀랠일(이적), 앓음고치기, 더러운검(귀신) 쫓아내기 등을 해내지만, 예수 이녁이 무리로부터 떠받쳐지는 것, 예수 이녁이 숭배되어지는 것, 예수 이녁이 하느님을 가리는 우상숭배 대상이 아니 되려는 것입니다.
- 둘째,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죽으려고 태어났음으로, 예수 이녁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녁이 죽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이녁이 하느님께서 죽으라는 말씀따라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른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나야 하기에, 아직 죽지 아니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로 아니 여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7-12많은 무리가 나아오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함께,메타) 바다로(을쪽으로,프로스) 물러가시니(뒤로가다,떠나가다,아나ㅎ코레오) 갈릴리에서(으로부터,아포) 큰(많은,폴뤼) 무리(무리,플레ㅅ도스)가 따르며(따르다,아콜뤼ㅅ데오)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많은,폴뤼) 무리(무리,플레ㅅ도스)가 그가 하신(만들다,포이에오) 큰[이 낱말은 딱히 없음] 일(한 것만큼,호소스)을 듣고(듣다,아쿠오) 나아오는지라(오다,에르ㅎ코마이)
9 예수께서 무리가(거쳐서,디아) 에워싸 미는(죄다,ㅅ들리보)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작은배,플로이아이온)를 대기하도록(가까이있다,프로스카르테레오)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시중들다,고치다,ㅅ데라퓨오)) 병(복수.골치거리,매,채찍,마스팈스)으로(목적격.을) 고생하는(가지다,에ㅎ코) 자들이 예수(그)를 만지고자(대다,만지다,가까이하다,함토마이)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닥치다,위로엎드리다,에피핖토)
2기림노래 : 일들을 하시고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숨기십니다. - 391. 오놀라운 구세주
- * 고요의 한마디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일들을 하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어야 하느님의 아들임을 들어나야 하기에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임을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과 한쪽(한편)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아직 아니 죽었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실이 아직 아니 끝났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알려져야하는 것의 사이에서 느기결(음양론, 변증법)의 그네(시소,seesaw)를 타십니다.
첫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들을 하십니다.
- 예수께서 하시는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에는 시도때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일인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을 하시는데 죽음을 무릅쓰십니다. 죽을줄 뻔이 아시면서도 하느님의 일, 해야할 일을 시도때로 없이 하십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이 어느날 하라고 날을 받아두었습니까?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하는 날이 어느 날이라고 딱 매겨져 있습니까?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안식일이라도 아니 하면 언제 하겠습니까?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에는 시도때도 없는데, 착한일이 안식일에 생겼으니, 안식일에도(안식일이니) 착한일 하고, 목숨건지는일이 안식일에 생겼으니 안식일에도(안식일이니) 목숨건지는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착한일, 목숨을건지는일이 생기는 쪽쪽 그때마다 합니다.
아마(설마) 안식일이라고 일을 아니 해야 한다고 하여, 착한일도, 아니하고, 목숨을건지는일도 아니 한다는 것이 옳습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이라도 착한 일이면, 목숨을 건지는 일이라면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에는 아니 일해야 하지만, 눈 앞에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을 그냥 모른 척한다는 말입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인데 눈 앞에 벌어진 일에 대해 착한일을 하고, 목숨건지는일을 하는 것이 아니 옳습니까? 아마(설마) 안식일에는 하느님께서 쉬시는 날이니, 덩달다 쉬라고 하셨기에 쉬어야 하는데, 뜸금없이 착한 일, 목숨건지는 일이 생겨으니, 오히려 할 일이 생겨겼으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닙니까? 아마(설마) 하느님께서 쉬시는 안식일이니 오히려 착한 일, 목숨을 건지는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하지 아니 합니까?
- 그래서 착한일, 목숨살리는일이라도 안식일에 하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이라고 하면 죽는다는 규정에 걸리지만,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곧 죽음을 무릅쓰고 착한일, 목숨살리는일이니 안식일에도 하십니다.
- 이처럼 예수께서 목숨을 걸고 안식일에 착한일, 목숨건지는 일을 하십니다. 헌데 이처럼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니, 바리새인들은 이때다 싶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드는 짓은 안식일 규정에 담겨진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안식일 규정의 글자에 하느님을 가두어 버리고, 이녁을 가두어 버리는 등 규정의 글자에 모두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꼴입니다. 이리 보면 이 짓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눈에 뭔가 씌워져서 못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때는 아니 기다린다(때는 기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닥친 일을 그냥 하면 됩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올바른일은 생기는 날을 아니 받아놓았기에,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생기는 쪽쪽 그냥 하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합니다. 그렇습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하려고 늘 기다리는, 벼르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합니다.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이 생기는 그때그때마다 닥치는 대로 그냥 하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 해야 할 일을 하는 데에는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합니다. 하느님의 일, 해야할 일을 시도때로 없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께서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됨됨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일,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해야 할 일은 시도때로 없이 생기기, 생기는 쪽쪽 해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일, 착한일, 목숨건지는일,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목숨걸어야 할 때 일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아직 아니 죽었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실이 아직 아니 끝났길래,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드러나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 드러나길 바라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것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사 하느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것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사 하느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것이란 하느님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죽으라는 말씀을 따라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하느님의 아들이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어진 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너는 죽으라"는 말씀을 따라 죽어져야 예수가 하느님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래하는 것(순종,복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시키신 말씀따라,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시킨신 말씀따라 죽어야 그때에서야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수께서 하느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죽기까지 아래했다(순종,복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시도때도 없이 하느님의 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일을 할 뿐아니라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고, 죽을 힘을 다해, 일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너는 죽으라"는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어질 때에야 드디어 하느님의 아들로서 일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러기까지 예수께서 이녁을 하는님의 아들로서 일컬어지기를 아니 바라십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예수께서 힘껏, 죽을 힘을 다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예수깨서 하느님의 말씀따라 죽으십니다. 그때에 드디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께 아래하는(순종,복종) 꼴입니다. 이녁이 예수의 이런 꼴, 모습, 매무새, 됨됨이를 닮고자 하자면, 이녁에게 하느님께 아래하여(순종,복종)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와 구실에 걸맞게 힘껏, 죽을 힘을 다해 시도때도없이 해내는 것입니다. 이녁은 사람사이에서, 수직적 가부장제 틀에서 차지하는 자리,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으로서 자리(수직적)에서, 그리고 맞멎는 자리(수평적)에서 할,바 곧 마주하는 이에게 이녁을 아니 드러내고, 낮추며, 아래하는 것(순종,복종)을, 죽기까지 이녁을 바치는 것(희생,사랑)을 시도때도없이 해 내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니 드러나려고 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 첫째,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놀랄일(기적), 놀랠일(이적), 앓음고치기, 더러운검(귀신) 쫓아내기 등을 해내지만, 예수 이녁이 무리로부터 떠받쳐지는 것, 예수 이녁이 숭배되어지는 것, 예수 이녁이 하느님을 가리는 우상숭배 대상이 아니 되려는 것입니다.
- 둘째,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죽으려고 태어났음으로, 예수 이녁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녁이 죽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이녁이 하느님께서 죽으라는 말씀따라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른(아래하는,순종하는,복종하는,고분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나야 하기에, 그렇다면 아직 죽지 아니한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아들로 아니 여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됨됨이에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갖습니다.
첫째, 이녁에게 시도때도 닥치는 하느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죽을지도 모를 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녁은 사는 동안, 죽기까기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이녁은 사는 동안 이녁을 죽여가면서(죽음을 무릅쓰고 이녁을 드러내서, 이녁의 온 몸과 온 마음을 써먹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둘째, 이녁이 수직적 가부장제에서 차지하는 자리와 구실에 따라 해야할 하느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는 동안에는, 죽기까지는 이녁을 드러내려고 생색을 내거나, 이녁을 알아달라고 옆구리 찔러 절받으려고 하거나, 이녁을 잊지 말라고 되새기려고 아니 달라드려야 합니다. 이는 이녁이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잊혀지는 이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 어버이라면 아이에게 어버이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아이에게 쉽사리 잊혀지는 어버이가 되는(어버이를 아니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 스승이라면 배우미에게 스승으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배우미에게 쉽사리 잊혀지는 스승이 되는(스승을 아니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 임자이라면 종에게, 임자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이녁은 쉽사리 잊혀지는 임자가 되는(임자를 아니 되새기게 하는, ) 것입니다.
- 임금이라면 아랫사람에게 임금으로서 할 바를 제대로 하면서도, 이녁은 쉽사리 잊혀지는 임금이 되는(임금을 아니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녁은 누구에게 이녁이 쉽사리 잊혀지도록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이녁은 사는 동안 이녁을 죽여가면서(이녁을 아니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 이녁은 사는 동안 착한일, 목숨건지는일을 죽음을 무릅쓰고하면서도, 이녁을 아니 들어나는 것의 쏭(妙,비밀), 깊이, 너비, 높이, 무게를 알아 살 수 있습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