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누가복음

누가복음 4장 1-32절 (7월) - "마귀와 사람들이 어디서나 시도 때도 꼬드기는 세 갈래 떠봄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예수스 2019. 3. 14. 22:51

42 누가복음 4장 1-32절 (7월) - "마귀와 사람들이 어디서나 시도 때도 꼬드기는 세 갈래 떠봄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때: 2019년 3월 15일(금) 사순절 첫째 주 성북로교회 금요기도회
  곳: 대전광역시 유성구 성북로161번길


1. 누가복음 4장 1-32절(7월)의 얼게 - "예수는 마귀와 사람에 의해 세 가지로 떠봄을 받다."
  - 마귀가 외진 곳에서 예수를 세 갈래 떠봄을 하고, 세 곳의 사람들도 그 세 갈래로 예수를 떠본다.
  첫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것이다.
  둘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는 것이다.
  셋째 떠봄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 갈래 떠봄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니 흔들리고, 의젓하다.

 
7월 4:1-32 
  1금 NA4:1-13 (12. 3. 4. 56:7. 8. 9:1011. 12. 13.)
  2금 NA4:14-15 (14. 15.)
  3금 NA4:16-30 (16. 17:18,19. 20. 21. 22? 23. 24. 25,26. 27. 2829:30.)
  4금 NA4:31-32 (31:32.)
 
   4장 1-32절에서 4:1-13(1금)은 마귀가 외진 곳에서 예수를 세 갈래로 떠 본다(4:3-4; 5-8; 9-12). 이 세 가래의 떠봄의 짝으로서 세 곳의 사람들이 예수를 떠본다. 첫째 떠봄은 갈릴리에서 4:14-15, 둘째 떠봄은 나사렛에서 4:16-30, 셋째 떠봄은 가버나움에 4:31-32이다. 아래 그림이 그 짝들을 보여준다.

                   마귀          그들       
    첫째 떠봄 4:3-4 <=> 4:14-15
    둘째 떠봄 4:5-8 <=> 4:16-30
    셋째 떠봄 4:9-12 <=> 4:31-32


1금 NA4:1-13 (4:12. 3. 4. 56:7. 8. 9:1011. 12. 13.) - 예수와 외진곳에서 마귀     - 예수는 거룩한 검(성령)의 것으로 가득하시다.  예수는 검(영) 안에서(으로) 외진 곳 안에서 이끌리고(아고) 있었다. 예수는 40일 동안 마귀(디아볼로스)에 의해 떠 보여지면서(페이라조) 아무것도 아니 잡수셨다. 그것들이 끝 날 때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됨됨이(자리와 구실,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로 떠보았다.
  - [창세기 3장 6절에 아담이 당한 시험은 첫째는 먹는 것과 관련되었고, 둘째는 눈의 즐거움,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과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말한 세 가지 시험,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도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된다.(100주년, 33 누가복음 ; 246쪽)]

    - 첫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아버지의 말씀이 없는데도 아들인 이녁의 뜻대로 하는 건방짐이다(이녁의 뻐김, 우쭐댐, 교만).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추겨 세움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녁의 뜻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진 힘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 보기로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네 뜻대로 할 만하고 할 힘도 있으니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리 할 힘도 있고, 네 뜻대로 할 만한 일이 될 것이니 해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힘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데 달리 이녁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신 8:3)

    - 둘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잊거나 잃어버리거나, 아예 바꿔치기 하거나, 깔보거나, 다른 자리나 구실을 덧붙이는 것이다.(이녁의 정체성을 잊어버림. 잃어버림, 깔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와 구실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거나 때로 가벼이 여기거나 깔보는 것이다.
    - 마귀는 예수에게 꾀길 하나님의 아들은 실속이 없고 마귀인 이녁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실속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도 되지만 마귀 이녁의 아들도 되라는 것이다. 마귀인 이녁에게 땅의 모든 나라들의 자리심(권세, 엨수시아) 그리고 빛남(영광, 돜사)이 넘겨져 있다. 그러니 만일 하나님의 아들인 네가 마귀 이녁의 앞에 절하면(프로스퀴네오), 이녁은 이녁에게 넘겨진 땅의 모든 나라들의 자리심(권세, 엨수시아)그리고 빛남(영광, 돜사)을 하나님의 아들인 너에게 주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마귀 이녁의 아들도 된다. 이것이 일석이조이다.
    ->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마귀인 네게 주어진 것도 이미 갖고 있다. 그러니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이 굳이 새삼스럽게 마귀인 너의 아들이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이 만일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네 말에 솔깃하여 그만 속아서, 이녁의 자리를 벗어나, 나의 아랫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은 꼴보기도 사납고, 웃음거리가 되니, 굳이 할 짓이 아니고, 반드시 해서도 아니 된다.(신 6:13)

    - 셋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와 하나님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가 맞는가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틈지게 하는(이간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준 아버지를 따져보는 것이다.(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맡김. 미쁨. 믿음을 떠봄)
    - 마귀는 예수에게 예수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인가 맞는가 하면서, 만약 그렇다면 예수 너와 하나님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면, 하나님이 예수인 너를 아들로서 여기고 있는 가를 보이라는 것이다. 마귀를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을 아버지 하나님이 참으로 아들로 여기는가를 아버지 하나님을 떠보라는 것이다. 그 보기로 예수인 너, 하나님의 아들인 네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너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에게 아들인 너는 지키는가를 보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인 나 예수와 나의 아버지 하나님 사이는 맡김, 믿음, 미쁨의 사이이다. 그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녁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는데, 만일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이 굳이 아버지 하나님을 떠보는 짓을 하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할 짓이 아니다.(신 6:16)
  - 마귀가 모든 떠봄(페이라스모스)을 마치고(쉰텔레오) 한 동안(키이로스) 물러났다(아ㅎ파스테미).


2금 NA4:14-15 (4:14. 15.) - 예수와 갈릴리
  -  예수는 검(영)의 힘(능력, 뒤나미스) 안에서 갈릴리로 되돌아가,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는데(디다스코), 모든 이들에 의해(휘포) 기려진다(칭송, 돜사조). 
  -> 이것은 예수를 우쭐하게 하는 떠봄이다. 모든 이들이 예수를 기리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 허나 예수는 모든 이들이 치겨세우는 것에 아니 흔들리며 의젓하다.


3금 NA4:16-30 (4:16. 17:18,19. 20. 21. 22? 23. 24. 25,26. 27. 2829:30.)  - 예수와 나사렛
  -예수는 이녁이 자라난 곳인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들에게 네 마디를 이르시는데 놀라게도, 꼴나게도 하시다.
  첫째, 예수는 나사렛에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알리다. -  이사야의 글(사 58:6; 61:1-2)에 적혀있는 "님(주)의 그저(은혜)의 해를 퍼뜨리는 것"을 예수 이녁이 하신다고 하시다.
  둘째, 예수는 나사렛을 빠져나오다. 예수는 이러한 이녁을 빈정대는 것은 떡(복) 터는 것임을 일러주어도 이녁을 몰아내는 나사렛 그들에게서 빠져나오다.
    - 예수가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다. (1) 예수는 그들이 예수 이녁을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꼬집는다. 곧 그들이 예수에게 "의사여 너 이녁을 고치라"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을 여기에서 만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2) 예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이 선지자(프로ㅎ테스)는 그의 고장(고향, 파트리스)에서 아니 받아들여진다(뎈토스)는 말처럼 선지자인 이녁을 따돌리고 있다고 말한다. (3) 예수는 그들이 이렇게 이녁에게 함으로써, 마치 엘리야, 선지자 엘리사가 한 사람만을 위해 보내졌다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떡(복)을 아니 받게 된다고 말한다.
    - 이런 예수의 말을 듣고 깨달아 뉘우치지 못하고 오히려 이리 말한 예수를 그들은 몰아내어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고 이끌어내는데, 예수는 여기에서 빠져 나왔다.
  -> 이것은 예수를 깔봄으로써 떠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양 하는 예수를 빈정거리며 몰아내며 따돌리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고, 우리의 이웃이자. 벗인 요셉의 아들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들로 부터 깔봄을 받았지만 예수는 아니 흔들리며 의젓하다,


4금 NA 4:31-32 (4:31:32.)] - 예수와 갈릴리 가버나움
  - 예수는 갈릴리의 고을인 가버나움에 와서 안식일에 가르치는데 그 말씀이 자리심(권위, 엨수시아) 안에 있어서 그들이 놀랐다(엨플레쏘).
  -> 이것은 예수를 하나님과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가를 떠봄이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이 자리심 안에 있어서 놀랐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하며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그에게 주어진 자리심(권위. 엨수시아) 안에 있다. 이처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자리에 있다. 자리심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에 그들이 놀라함으로 떠봄에서도 예수는 이런 것에도 아니 흔들리며 의젓하다.


  * 고요의 한 마디 - "마귀와 사람의 떠봄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아니 흔들리며 의젓합니다."

   사람을 떠보는, 또는 꼬득이는 물음에는 세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대는 그 사람 맞는가? 그대는 가짜 아닌가?
  둘째, 그대는 이번 기회에 그대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그럴싸 한 것으로 바꿀 생각없는가?
  셋째, 그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면 이번 기회에 그대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면서까지 해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세가지 떠봄이 마귀가 빈, 외진 곳에서 예수를 40일 굶기며 이끌다가 40일이 되었을 때 예수를 떠보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떠봄에 짝이 되게 세 곳의 사람들이 예수를 떠봅니다.
  성경의 글차림 대로 늘어놓으면 
  첫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 자리와 구실을 차지하는 건방짐, 뻐김, 우쭐댐, 교만에 대한 떠봄입니다.
  둘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됨됨이(자리와 구실)을 잊어버리거나. 읿어버리거나, 깔보고, 아예 마귀의 아들로서 자리와 구실로 바꿔치기 하거나, 아니면 마귀의 아들로서 자리와 구실로 하나 더 꿰차게 하는 떠봄입니다.
  셋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준 아버지를 따져보라고(확인하게) 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틈지게 하는(이간질) 것입니다. 곧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맡김, 미쁨, 믿음을 확인한다는 뜻에서 흔들어보게 함으로써 빈틈이 내게 하는 떠봄입니다.
  이런 마귀와 사람들의 떠봄에 예수께서는 이런 것에도 아니 흔들리며 의젓합니다.
  

2 누가복음 4장 1-32절(7월) 새김 그리고 새번역(2001) - "마귀와 사람들이 어디서나 시도 때도 꼬드기는 세 갈래 떠봄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 고요의 한 마디 - "마귀와 사람의 떠봄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아니 흔들리며 의젓합니다."

   사람을 떠보는, 또는 꼬드기는 물음에는 세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대는 그 사람 맞는가? 그대는 가짜 아닌가?
  둘째, 그대는 이번 기회에 그대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그럴싸 한 것으로 바꿀 생각없는가?
  셋째, 그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면 이번 기회에 그대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면서까지 해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세가지 떠봄이 마귀가 빈, 외진 곳에서 예수를 40일 굶기며 이끌다가 40일이 되었을 때 예수를 떠보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떠봄에 짝이 되게 세 곳의 사람들이 예수를 떠봅니다.

  성경의 글차림 대로 늘어놓으면 

  첫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 자리와 구실을 차지하는 건방짐, 뻐김, 우쭐댐, 교만에 대한 떠봄입니다.
  둘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됨됨이(자리와 구실)을 잊어버리거나. 읿어버리거나, 깔보고, 아예 마귀의 아들로서 자리와 구실로 바꿔치기 하거나, 아니면 마귀의 아들로서 자리와 구실로 하나 더 꿰차게 하는 떠봄입니다.
  셋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준 아버지를 따져보라고(확인하게) 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틈지게 하는(이간질) 것입니다. 곧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맡김, 미쁨, 믿음을 확인한다는 뜻에서 흔들어보게 함으로써 빈틈이 내게 하는 떠봄입니다.

  이런 마귀와 사람들의 떠봄에 예수께서는 이런 것에도 아니 흔들리며 의젓합니다.


  1) 4:1-13(1금) - 예수와 외진곳에서 마귀  - 예수는 거룩한 검(성령)의 것으로 가득하시다.  예수는 검(영) 안에서(으로) 외진 곳 안에서 이끌리고(아고) 있었다. 예수는 40일 동안 마귀(디아볼로스)에 의해 떠보여지면서(페이라조) 아무것도 아니 잡수셨다. 그것들이 끝 날 때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됨됨이(자리와 구실,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로 떠보았다.
  - [창세기 3장 6절에 아담이 당한 시험은 첫째는 먹는 것과 관련되었고, 둘째는 눈의 즐거움,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과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말한 세 가지 시험,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도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된다.(100주년, 33 누가복음 ; 246쪽)]

    - 첫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아버지의 말씀이 없는데도 아들인 이녁의 뜻대로 하는 건방짐이다(이녁의 뻐김, 우쭐댐, 교만).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추겨세움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녁의 뜻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진 힘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 보기로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네 뜻대로 할 만하고 할 힘도 있으니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리 할 힘도 있고, 네 뜻대로 할 만한 일이 될 것이니 해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힘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데 달리 이녁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신 8:3)

    - 둘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잊거나 잃어버리거나, 아예 바꿔치기 하거나, 깔보거나, 다른 자리나 구실을 덧붙이는 것이다.(이녁의 정체성을 잊어버림. 잃어버림, 깔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와 구실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거나 때로 가벼이 여기거나 깔보는 것이다.
    - 마귀는 예수에게 꾀길 하나님의 아들은 실속이 없고 마귀인 이녁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실속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도 되지만 마귀 이녁의 아들도 되라는 것이다. 마귀인 이녁에게 땅의 모든 나라들의 자리심(권세, 엨수시아) 그리고 빛남(영광, 돜사)이 넘겨져 있다. 그러니 만일 하나님의 아들인 네가 마귀 이녁의 앞에 절하면(프로스퀴네오), 이녁은 이녁에게 넘겨진 땅의 모든 나라들의 자리심(권세, 엨수시아)그리고 빛남(영광, 돜사)을 하나님의 아들인 너에게 주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마귀 이녁의 아들도 된다. 이것이 일석이조이다.
    ->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마귀인 네게 주어진 것도 이미 갖고 있다. 그러니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이 굳이 새삼스럽게 마귀인 너의 아들이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이 만일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네 말에 솔깃하여 그만 속아서, 이녁의 자리를 벗어나, 나의 아랫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은 꼴보기도 사납고, 웃음거리가 되니, 굳이 할 짓이 아니고, 반드시 해서도 아니 된다.(신 6:13)

    - 셋째 떠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와 하나님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가 맞는가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틈지게 하는(이간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준 아버지를 따져보는 것이다.(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맡김. 미쁨. 믿음을 떠봄)
    - 마귀는 예수에게 예수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인가 맞는가 하면서, 만약 그렇다면 예수 너와 하나님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면, 하나님이 예수인 너를 아들로서 여기고 있는 가를 보이라는 것이다. 마귀를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을 아버지 하나님이 참으로 아들로 여기는가를 아버지 하나님을 떠보라는 것이다. 그 보기로 예수인 너, 하나님의 아들인 네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너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에게 아들인 너는 지키는 가를 보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인 나 예수와 나의 아버지 하나님 사이는 맡김, 믿음, 미쁨의 사이이다. 그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녁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는데, 만일 하나님의 아들인 이녁이 굳이 아버지 하나님을 떠보는 짓을 하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할 짓이 아니다.(신 6:16) - 마귀가 모든 떠봄(페이라스모스)을 마치고(쉰텔레오) 한 동안(키이로스) 물러났다(아ㅎ파스테미).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3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1)'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5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6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7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8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2)'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9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10 성경에 기록하기를 3)'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12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4)'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13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2) 4:14-15(2금) - 예수와 갈릴리 -  예수는 검(영)의 힘(능력, 뒤나미스) 안에서 갈릴리로 되돌아가,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는데(디다스코), 모든 이들에 의해(휘포) 기려진다(칭송, 돜사조). 
  -> 이것은 예수를 우쭐하게 하는 떠봄이다. 모든 이들이 예수를 기리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벗어나 보라는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 허나 예수는 모든 이들이 치켜세우는 것에 아니 흔들리며 의젓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15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마 4:12-17; 막 1:14-15)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15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3) 4:16-30(3금) - 예수와 나사렛 -예수는 이녁이 자라난 곳인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들에게 네 마디를 이르시는데 놀라게도, 꼴나게도 하시다.
  첫째, 예수는 나사렛에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알리다. -  이사야의 글(사 58:6; 61:1-2)에 적혀있는 "님(주)의 그저(은혜)의 해를 퍼뜨리는 것"을 예수 이녁이 하신다고 하시다.
  둘째, 예수는 나사렛을 빠져나오다. 예수는 이러한 이녁을 빈정대는 것은 떡(복) 터는 것임을 일러주어도 이녁을 몰아내는 나사렛 그들에게서 빠져나오다.
    - 예수가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다. (1) 예수는 그들이 예수 이녁을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꼬집는다. 곧 그들이 예수에게 "의사여 너 이녁을 고치라"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을 여기에서 만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2) 예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이 선지자(프로ㅎ테스)는 그의 고장(고향, 파트리스)에서 아니 받아들여진다(뎈토스)는 말처럼 선지자인 이녁을 따돌리고 있다고 말한다. (3) 예수는 그들이 이렇게 이녁에게 함으로써, 마치 엘리야, 선지자 엘리사가 한 사람만을 위해 보내졌다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떡(복)을 아니 받게 된다고 말한다.
    - 이런 예수의 말을 듣고 깨달아 뉘우치지 못하고 오히려 이리 말한 예수를 그들은 몰아내어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고 이끌어내는데, 예수는 여기에서 빠져 나왔다.
  -> 이것은 예수를 깔봄으로써 떠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양 하는 예수를 빈정거리며 몰아내며 따돌리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녁의 자리와 구실을 아예 버리고, 우리의 이웃이자. 벗인 요셉의 아들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들로 부터 깔봄을 받았지만 예수는 아니 흔들리며 의젓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30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시다(마 13:53-58; 막 6:1-6)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5)"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24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6)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7)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8)고침을 받았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4) 4:31-32(4금) - 예수와 갈릴리 가버나움 - 예수는 갈릴리의 고을인 가버나움에 와서 안식일에 가르치는데 그 말씀이 자리심(권위, 엨수시아) 안에 있어서 그들이 놀랐다(엨플레쏘).
  -> 이것은 예수를 하나님과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가를 떠봄이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이 자리심 안에 있어서 놀랐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하며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그에게 주어진 자리심(권위. 엨수시아) 안에 있다. 이처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자리에 있다. 자리심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에 그들이 놀라함으로 떠봄에서도 예수는 이런 것에도 아니 흔들리며 의젓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37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막 1:21-28)
31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로 내려가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 기림노래 -  379장. 149장. 545장.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를 벗어나라고 꼬드깁니다.(교만) : 379.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 아예 버리라고 꼬드깁니다. (탐욕) : 149. 주 달려 죽은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아니 맡기라고 꼬드깁니다(불신) : 545.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끝.